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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도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이다. 오다니 성 성주인 부친 아자이 나가마사가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후 히데요시의 보호하에 들어갔다.

 

 

 

 

이후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히데요리를 낳았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히데요리를 후견하며 오사카 성의 실권을 잡았지만, 이에야스와의 전투에서 패해 히데요리와 함께 자결하였다.

 

요도도노
요도도노

출생 - 사망 1567년(?) ~ 1615년 6월 4일
시대 센고쿠 시대
별칭 차차(茶々)
가문 아자이(浅井) 가문
부모 부 :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모 : 오이치(お市)
배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요도도노는 오미 오다니 성의 성주인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이다. 아자이 가문의 기록인 『아자이 삼대기(浅井三代記)』에도 그녀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에도 시대의 수필 『옹초(翁草)』에는 1567년 생으로 되어 있다.

 

1573년 아버지 나가마사와 외삼촌 노부나가의 사이가 악화되어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았고, 오다니 성이 포위되자 어머니와 여동생 두 명과 함께 탈출했다. 아버지 나가마사가 죽은 후에 오와리 기요스 성에서 외삼촌인 노부카네의 보살핌을 받았다.

 

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횡사하자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인 오다 노부타카는 오다 가문의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요도도노의 어머니 오이치를 가쓰이에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 대립하고 있던 가쓰이에는 1583년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여 에치젠의 기타노쇼 성에서 어머니 오이치와 함께 자결하였다. 오이치의 장녀 차차를 비롯한 세 자매는 성을 나와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았다.

 

그 뒤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자신의 측실로 삼았다. 히데요시에게는 여러 처첩이 있었으나 1589년 요도도노만이 유일하게 아이를 낳았다.

 

히데요시는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후견인으로 호소카와 다다오키를 보좌인으로 삼아 야마시로 국의 요도 성을 개축하여 그녀를 그곳에서 살게 했다. 이후 그녀는 요도도노로 불렸다. 그러나 첫째 아들인 쓰루마쓰는 1591년 8월 5일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다

1592년 조선 침략에 나설 때, 히데요시는 히젠 나고야 성으로 갔고 이때 요도도노도 함께했다. 요도도노는 진중에서 회임하여 1593년에 둘째 아이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았다. 1594년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와 함께 히데요시의 은퇴 성인 후시미 성 니시노마루에 거주하였는데, 당시 요도도노의 권세는 정실인 기타노만도코로 네네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유언에 따라 1599년 1월 10일 히데요리와 함께 난공불락의 오사카 성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요도도노와 가까운 사이였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잡으면서 도요토미 가문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행사하던 실권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보임된 이후 전국에 분포되어 있던 히데요시의 직할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히데요리는 사실상 셋쓰, 가와치, 이즈미 3개국 65만 석을 지배하는 다이묘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조정의 관위로는 도쿠가와 가문에 필적했으며, 히데요시에게 큰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이 아직 건재했다.

 

 

 

오사카 여름 전투 · 겨울 전투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후견인의 역할을 하며 오사카 성의 실권을 행사했다. 그녀는 도쿠가와 가문 세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에야스와 화평을 주장하며 양자의 중개 역할을 맡은 가타기리 가쓰모토를 배척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오노 하루나가를 중용했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와의 타협할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져 갔다.

 

1614년 이에야스는 호코지(方広寺) 대불전의 종에 새겨 넣은 글귀의 내용을 구실로 히데노리 측을 압박했다. 이에야스는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든가, 혹은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전봉(다이묘의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할 것을 강요했다.

 

요도도노 등은 여기에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그해 겨울 양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요도도노는 성내에서 저항했지만,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다른 다이묘들이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요도도노는 이에야스에게 화해를 청해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얼마 못가 이듬해 1615년 여름 다시 전투가 발발했다. 결국 5월 8일 오사카 성은 함락되고 요도도노는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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