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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수군을 이끌고 일본과의 해전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신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오해와 진실이 섞여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다섯 가지 오해와 진실을 알아보겠습니다.

 

 

1.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 23전 23승을 거뒀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23전 23승을 거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2004년에 방영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을 '23전 23승’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구체적인 해전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계산한 것이었습니다.

 

드라마 제작진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해전을 나열한 것은 아니고 대략적으로 셈해서 표현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영향력이 커서 '23전 23승’이라는 숫자가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널리 퍼졌습니다.

 

이순신 장군 5가지 오해와 진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실제 전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해전을 '대표해전’과 '세부해전’으로 나누어서 셉니다.

 

'대표해전’은 조선 수군이 한 번 출전해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기간 중에 있었던 모든 해전을 하나로 묶은 것이고, '세부해전’은 한 번 출전한 기간 중에 있었던 모든 전투를 각각 하나로 산정한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에는 대표해전이 총 21회, 세부해전이 총 49회 있었고, 이순신 장군은 17회의 대표해전과 45회의 세부해전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참가한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즉, 이순신 장군의 전적은 '17전 17승’이나 '45전 45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분류 기준에 따라 승전한 해전의 숫자가 정확히 몇 번인지는 달라질 수 있어 추가 연구가 필요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23전 23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철쇄(쇠사슬)를 설치해 승리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200여 척의 왜선과 맞서 승리한 놀라운 해전입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 철쇄(쇠사슬)를 설치해서 왜선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승리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 설화입니다. 철쇄에 대한 언급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데, 이는 저자가 지방을 돌며 설화를 채록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료입니다.

 

 

 

이에 비해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난중일기’에는 철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실록’을 비롯한 17세기까지의 어떠한 사료에도 철쇄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호남절의록’이나 ‘현무공실기’ 같은 문헌에는 기록이 있지만, 이 역시 내용을 조금만 살펴보면 설화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명량해전은 철쇄가 아니라 명량의 빠른 조류와 좁은 물목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는 데 성공한 해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부 작가나 드라마 등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었다는 '자살설’이나 죽음을 위장해 숨어 살다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은둔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무능한 조정과 당쟁의 부조리를 부각시켜 장군이 당쟁의 희생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적 영웅의 비극적 일생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습니다.

 

 

 

장군의 자살설은 숙종 당시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가 쓴 의병장 김덕령의 전기에서 '이순신이 투구를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으로 인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국 전국시대 진(晉)의 장수 선진(先軫)의 고사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지 실제로 투구를 벗은 행동은 아닙니다.

 

또 2005년 발굴된 장군의 큰아들이 1598년 12월 13일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 부친의 전사 후 친히 와서 곡하고 제사를 차려 준 일과 부의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을 들어 은둔설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4. 이순신 장군은 몰락한 집안의 아들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이용 이순신 장군 전기에서 흔히 등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영웅 만들기’를 위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위대한 인물이 됐다는 과장된 스토리텔링이 굳어진 것일 뿐이다.

 

실제 장군은 현조부(5대조)와 증조부가 고위 관직을 역임했고 조부 역시 종8품의 직책을 역임했다. 부친은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사대부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모친과 장군의 부인 역시 지방관의 딸이었다는 점에서 외가 역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장군의 집안이 매우 부유한 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대부 가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5.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쫄병으로 참전했다?

이 역시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인식이다. 백의종군은 장형(杖形)을 집행한 다음, 관작(官爵)과 보직 없이 충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상황에서 적을 맞아 싸울 장수가 부족한 현실에서 전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는 의미로 부과된 비교적 가벼운 형벌에 해당합니다.

 

백의종군이 적어도 과거에 급제한 인물 이상에만 적용한 점을 들어 장군의 백의종군 중 신분을 졸병이라고 보는 항간의 인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이 되기 전에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고, 1583년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1591년에는 전라좌도 수군통제사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해상 전력을 유지하고 일본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원균과의 당쟁에서 밀려나고, 모함과 방자의 혐의를 받아 장형을 당하고 백의종군이 되었지만 그는 백의종군으로서도 조선의 해상 전력을 이끌고 일본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1597년에는 전라좌도독립사로 승진하고, 1598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조선의 해상 전력을 지키고 일본의 침략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드라마나 소설 등의 허구적인 표현에 의해 왜곡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적과 희생은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교훈이며, 영원한 영웅입니다. 여러분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

 

난중일기 도난 사건

 

 

이순신장군 업적 연대표

 

 

 

원균, 이순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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