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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의 인물이다. 아즈치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를, 모모야마 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를 지칭한다. 1558년 오다 노부나가를 섬긴 이후 거듭 전공을 세워 중용되기 시작했으며, 1573년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킨 후 그 땅인 나가하마에 성을 쌓아 성주가 되었다.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인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주고쿠 침공 중이던 히데요시는 곧바로 군대를 돌려 배신자 미쓰히데를 죽였다. 이 일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이후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각 지역의 다이묘들을 굴복시켜 일본 국내 통일을 달성했다. 1592년 조선을 침략했으나 패배했고 1598년 후시미 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출생 - 사망 1537년 ~ 1598년 8월 18일
시대 센고쿠 시대 -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지위 간바쿠(關白), 다이코(太閤)
별칭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하시바(羽柴) 도키치로
하시바 지쿠젠노카미(筑前守)
하게네즈미(대머리 쥐)
도요쿠니 다이묘진(豊國大明神, 법명 및 신호)
가문 기노시타(木下) 가문 → 하시바(羽柴) 가문 → 도요토미(豊臣) 가문
부모 부 :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
모 : 오만도코로(大政所)
배우자 정실 : 고다이인(高台院, 기타노만도코로)
측실 : 요도도노(淀殿)

평민에서 통일 일본의 맹주가 된 센고쿠 시대의 총아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도미 히데요시
Portrait of Toyotomi Hideyoshi, part of (Kodaiji holdings)

출생 연도와 신분

히데요시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1536년 1월 1일로 기록하고 있는 『태합소성기(太閤素性記)』와 『명량홍범(明良洪範)』, 1536년 6월 15일의 『조부물어(祖父物語)』, 1537년 2월 6일의 『천정기(天正記)』 「관백임관기(關白任官記)」 · 『풍감(豊鑑)』 · 『당대기(當代記)』이다.

 

 

이들 자료 이외에 사료 가치가 높은 『공경보임(公卿補任)』에 실린 연령으로 추정하면, 히데요시는 1536년생으로 63세에 사망한 것이 된다. 그러나 『공경보임』에는 정치적 고려가 반영되어 있다. 현재 일본학계는 자료 성격이나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1537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히데요시의 출신 신분에 관해서도 부친 야에몬이 기노시타라는 묘지(苗字)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히데요시의 신분은 상층 농민인 묘슈(名主) 계급의 백성이란 설과 기노시타라는 묘지 사용 자체를 부정하고 일개 백성에 불과하다는 설로 나뉘고 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에는 히데요시 스스로 미천한 신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히데요시의 출신이 가난한 일개 백성이었음을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더욱이 히데요시라는 이름이 사료에서 명확하게 확인되는 것은 그의 나이 거의 30세에 가까운 1565년에 이르러서이다. 1565년 11월에 노부나가가 미노 국 쓰보우치 도시사다에게 발급한 토지소유를 인정해 준 문서에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라는 서명이 날인되어 있다. 이 무렵부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실무 행정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 기노시타라는 성은 히데요시의 정실인 고다이인(기타노만도코로, 네네)의 오빠인 이에사다가 기노시타 성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처가 쪽의 성을 빌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고다이인의 원래 성은 스기하라였기 때문에, 고다이인의 오빠가 오히려 히데요시로부터 기노시타 성을 물려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히데요시의 아명이 ‘히요시마루’라는 주장은 오제 호안의 『태합기(太閤記)』에 히데요시 어머니가 태양을 품는 꿈을 꾸고 회임했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인데, 이는 호안의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또 『태합소성기』에는 아명을 원숭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히데요시가 원숭이 모양을 닮았음을 지적한 것이며 정식 아명으로 적시한 것은 아니다.

 

한편 낮은 신분에서 일어나 무사 최고 자리에 오른 히데요시는 자신과 천황 가문 사이에 모종의 ‘피’의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은 『천정기(天正記)』에 잘 보인다.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의 정당성과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문서행정 비서격인 오무라 유코를 시켜 자신의 행적을 적은 『천정기』를 편찬하게 했다.

 

이 책은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관백임관기(關白任官記)」의 경우, 1585년 8월 길일에 썼다는 오쿠가키(책의 끝머리에 내역을 적어 놓은 기록)가 있어 당대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히데요시가 1537년 2월 6일에 태어났다고 하는 등 출생과 관련한 중요한 서술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조부는 하기 주나곤이라는 인물로 궁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세 살 되던 때 참언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져 오와리 국 무라쿠모에 칩거했다. 그 후 참언이 무고임이 밝혀져 히데요시 어머니가 상경하여 3년간 궁녀로 있다가 다시 낙향했는데, 얼마 후 히데요시가 태어났다.

 

히데요시가 어릴 때부터 기담이 많아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어찌 왕씨(王氏)가 아니라면 이러한 준걸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히데요시가 천황의 후예임을 주장했다. 히데요시 시기에도 무사 수장과 ‘고귀한 피’를 가진 천황을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강고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가출과 성장

『태합소성기』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오와리 국 아이치 군 나카무라 출신으로, 부친 기노시타 야에몬과 모친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야에몬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노부히데의 하급 무사(아시가루) 출신인데 부상을 입어 백성이 되었다고 한다. 야에몬이 죽은 후 어머니는 오다 가문에 소속되어 예능을 담당하던 지쿠아미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계부 슬하에서 자란 히데요시는 16세가 되던 해 집을 나와 친부가 유산으로 남겨준 영락전(永樂錢)을 종잣돈으로 삼아 바늘 장수를 하면서 당시 도카이도 지역에서 가장 부강한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고자 했다. 히데요시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마쓰시타 유키쓰나의 부하가 되었지만 뛰어난 일솜씨로 주변 동료에게 시기를 받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히데요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인의 소개로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 히데요시의 행적을 말해주는 확실한 사료는 거의 없다.

 

 

1560년 오다 노부나가가 수천 명의 병사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만 명의 대군을 물리친 오케하자마 전투가 발발했을 때는 하급 무사 아시가루를 통솔하는 아시가루 조장(組頭) 정도의 지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561년 8월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인 고다이인(네네)과 결혼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25세, 고다이인의 나이는 13세였다.

 

 

이후 1565년 문서에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기까지 여러 활동과 에피소드는 『태합기』에 상세히 적혀 있다. 물론 이러한 에피소드는 다소 과장되고 경우에 따라 창작된 이야기도 적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낮은 지위에서 점차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높은 신분으로 올라간 것은 분명했다. 1568년 노부나가가 교토에 상경할 때 히데요시는 이미 오다 가문의 중요 가신이 되어 있었다.

 

 

하시바를 칭하다

1573년 7월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쫓아내 사실상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기노시타에서 하시바로 성을 바꿨다.

 

그해 7월 20일자 야마시로 국 오야마자키 마을에 내린 문서에 하시바 도키치로 히데요시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하시바는 오다 가문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서 성(姓)의 유래가 다양한 일본에서도 그 예를 찾기 어려운 매우 특이한 조합이었다.

 

이 역시 히데요시의 출신이 낮음을 방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누구보다 중시했고, 자신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히데요시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1575년 7월 3일 노부나가는 관위 승진을 권유하는 조정에 자신이 승진하지 않는 대신 가신에게 관직을 내려줄 것을 주청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아케치 미쓰히데 등 5인이 관직을 받았다.

 

여기에 히데요시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도 지쿠젠노카미(筑前守)를 자칭한 것으로 보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문서집』을 보면 7월 26일에 지쿠젠노카미가 처음 등장한다.

 

히데요시는 교토 상경 이후 교토 주변의 정무를 담당하는 실무 봉행(奉行)으로 활동하다가, 1573년 9월 아자이 가문이 멸망된 이후에는 오미 북부를 다스리는 다이묘로 봉해졌다. 그리고 비호 호수 근처 나가하마에 성을 쌓아 꿈에 그리던 성을 보유한 무사(城持) 지위에 올랐다.

 

 

주고쿠 공략과 모리 가문과의 전투

1577년 10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모리 가문이 지배하는 주고쿠를 평정하려고 출진했다. 사실 히데요시는 일찍부터 모리 가문을 상대하는 외교 창구를 맡고 있었다. 당초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양자의 관계가 파탄나자 히데요시는 이를 추궁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을 공략하기 위해 그 중간에 위치한 하리마 국과 다지마 국을 먼저 공략했다. 1577년 하리마, 미마사카, 비젠의 삼국 접경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 고즈키 성을 차지하기 위해 모리 가문과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여 비젠 국 다이묘 우키타 나오이에를 복속시켰다.

 

그러나 1578년 기내 지역의 중요 거점이자 히데요시 배후에 위치한 셋쓰 국의 아라키 무라시게가 모리 가문과 연계하여 돌연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은 일시 중단되었고, 하리마 지역의 반란은 들풀처럼 번져 나갔다.

 

1580년 히데요시는 반기를 든 하리마의 미키 성 성주인 벳쇼 나가하루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듬해 10월에는 모리 가문의 유력 일족인 깃카와 쓰네이에가 농성 중인 돗토리 성까지 함락시켰다.

 

이나바 국에 위치한 돗토리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 높은 곳이라 모리 가문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1582년에는 빗추까지 진격하여 시미즈 무네하루가 지키는 다카마쓰 성에 물을 가두어 놓은 둑을 일시에 터뜨려 수장시키는 수공(水攻)을 구사하여 성을 공략했다.

 

 

 

아케치 미쓰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죽음

그런데 6월 2일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혼노지의 변).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숨기고 다카마쓰 성의 원군으로 온 모리 데루모토와 급히 강화를 맺었다. 이후 긴키 지역으로 놀랄 만큼 재빨리 회군하여 6월 13일 셋쓰의 야마자키에서 미쓰히데와 싸워 승리했다.

 

미쓰히데는 모리 가문과 싸우고 있던 히데요시가 이렇게 빨리 회군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해 이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으로 미쓰히데는 달아나는 도중에 현지 백성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를 자신이 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1582년 6월 27일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 오와리 기요스 성에서 회의가 열렸다.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히데요시 4명은 논란 끝에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인 산포시를 후계자로 정했다.

 

당초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와 둘째 아들 노부카쓰가 유력한 후보자였으나 히데요시는 혈통상 산포시 우위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켰다. 니와 나가히데와 이케다 쓰네오키가 히데요시 편이었던 까닭에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지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는 혼자 고립된 양상이었다. 히데요시는 자기주장을 관철시킨 반대급부로 영지 분배는 양보하여 오미 북부를 가쓰이에에게 양도했다.

 

그해 10월에는 노부나가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양자인 히데카쓰를 내세워 노부나가의 장례식과 일주기 법요식을 주도했다. 이때 다이라노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다이라 성(姓)을 사용했던 노부나가의 정통 후계자임을 암암리에 내비쳤다. 가쓰이에는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히데요시를 향해 비난을 퍼부어 양자 간 대립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마침내 1583년 4월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를 격파한 후 여세를 몰아 가쓰이에의 본거지인 기타노쇼까지 쳐들어갔다. 가쓰이에는 이를 막지 못해 자결했으며, 얼마 후 가쓰이에와 동맹을 맺었던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도 자결했다. 또 이들과 동맹관계였던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항복하여 히데요시의 패권은 확고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결

1583년 5월 히데요시는 셋쓰 오사카의 이케다 쓰네오키를 미노 국으로 전봉(다이묘의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시키고 그 지역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다. 같은 해 8월에는 기내 등지에서 토지조사를 실시했고 9월에는 오사카 성의 축성을 시작했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히데요시에 대항했다. 히데요시는 군대를 이끌고 가 오와리 국 이누야마 성을 본진으로 삼아 고마키야마에 진을 친 노부카쓰 ·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이에야스의 본거지를 치기 위해 출진한 조카 히데쓰구가 나가쿠테에서 이에야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양자의 대치 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데요시는 그의 장기인 외교전을 펼쳐 11월 노부카쓰와 단독으로 화해를 맺어 이에야스가 계속해서 싸울 명분을 없애버렸다. 그 결과 12월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와 화해했다.

 

 

 

1584년의 고마키 · 나가쿠테 전투는 히데요시에게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압도적인 무력을 기반으로 상대방을 힘으로 제압해 나가는 노부나가의 무력 중시 노선을 폐기하고, 외교와 명분을 전면에 내세운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때까지 노부나가처럼 조정(천황)과 거리를 두었던 히데요시는 적극적으로 조정에 접근하여 천황이란 전통적 권위를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히데요시는 1584년 11월 22일 종3위 권대납언에 서임받아 조정의 최상급 관인인 공경 반열에 올랐다. 이후 히데요시는 죽기까지 공경의 지위를 유지했다. 히데요시는 조정(천황)의 권위를 활용하는 노선을 계속 유지하여 1585년 3월에는 정2위 내대신, 7월 종1위 간바쿠(關白)가 되었다.

 

간바쿠는 원래 섭가라는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적자 가문에만 한정된 직책이었는데, 히데요시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 이 직책에 올랐다. 간바쿠는 후지와라 가문에 한정된다는 전통의 틀을 고수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실력 우위의 노선을 변경하여 전통 세력과 타협을 모색했고, 이 과정에서 ‘관위제’라는 기존 형식(질서)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규슈 공략과 전국 통일

1587년 5월 가고시마의 시마즈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면서 규슈 평정은 완료되었다. 그런데 규슈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그때까지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던 정책을 갑자기 폐기하고, 6월에 크리스천을 통제하는 법령을 내려 다이묘가 자국 백성을 강제로 크리스트교에 입교시키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히데요시는 크리스트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전통적인 신불관에 입각하여 일본이 신국(神國)임을 강조했다. 이 역시 사원과 조정 등 전통세력을 배려한 조치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법령을 내리는 등 한층 강경한 정책을 폈다.

 

1588년 4월에 히데요시는 교토의 다이다이리에 취락제라는 이름의 대저택을 지었다. 여기에 천황을 초청하고 천황 권위를 빌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29명의 다이묘로부터 충성을 맹세하는 기청문을 받아 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해 오랜 기간 떠돌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도 이때 교토로 돌아와 삭발하고 출가했다. 이로써 무로마치 쇼군 가문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그해 7월에 히데요시는 무기 몰수령인 도수령(刀狩令)과 바다의 약탈을 금지하는 해적금지령(海賊停止令)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백성들을 무장하지 못하게 했으며, 오로지 경작에 힘쓰게 했다.

 

이를 통해 무사를 제외한 다른 계층이 무기를 소유해 지배자인 무사에 대항하는 길을 봉쇄하고자 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 사이의 지역 분쟁도 종식시켜 자신이 이를 통제했다.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천황의 지시임을 내세워 토벌에 나섰다. 규슈의 시마즈 가문이나 간토의 호조 가문 공격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1587년 간토 · 오슈에 분쟁을 금지하는 명령인 ‘총무사령(惣無事令)’을 내렸지만 호조 가문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호조 가문에 복속의 징표로서 교토로 상경할 것을 여러 차례 지시했지만 호조 우지마사는 여기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에 1590년 히데요시는 자기 휘하의 모든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오다와라 성을 공격하여 호조 가문을 멸망시켰다. 8월에는 동북 지역의 아이즈 성에 입성하여 오우의 여러 다이묘들의 영지를 확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간토로 이주시켜 전국통일을 완성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전쟁을 일으킨 원인

이듬해인 1591년 8월에는 1589년 5월에 태어난 히데요시의 적자 쓰루마쓰가 요절했다. 불과 1년 전에 일본을 통일하여 의기양양해 있던 히데요시의 낙담은 극에 달했다.

 

이윽고 12월에 히데요시는 간바쿠 직을 조카 히데쓰구에게 양도하고 본인은 은퇴한 간바쿠를 칭하는 다이코(太閤)의 신분으로 오로지 대외 침략 전쟁에 집중했다.

 

① 무역 · 상업 등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견해(은무역)

② 히데요시의 개인의 입장을 강조하는 견해(功名論)

③ 영주 계급의 이익이나 도요토미 정권의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영토 확장설)

 

그중 쓰루마쓰 요절을 중시하는 입장은 ②에 해당한다. 도요토미 정권이 일으킨 전쟁이란 측면에서는 ①과 ③의 관점이 중요하지만, 히데요시 개인에 한정하면 ②의 측면이 보다 본질적이다. 당시로서는 할아버지 나이라 할 50세가 넘어 겨우 얻은 아들의 죽음은 히데요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미 1586년 일본 예수회 부관구장인 가스펠 코엘류를 만났을 때부터 히데요시는 자신이 이미 최고 지위에 올랐고, 더 이상 금 · 은을 획득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단지 나의 명성과 권세를 사후에 전하는 것을 소망할 뿐”이라 밝히고 있다(『프로이스일본사』).

 

히데요시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제가 바라는 바는 다른 것이 없고 단지 가명(佳名)을 삼국에 남길 뿐입니다.”고 한 것도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아들을 잃은 히데요시의 심정과 그렇기에 자신의 명예(이름)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 대목으로 볼 수 있다.

 

1592년에 시작된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1593년 6월 일단 강화를 맺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1594년 8월에 측실인 요도도노가 또다시 한 명의 아들(히데요리)을 낳았다.

 

히데요시의 후계자 선정과 죽음

 

당초 친자식을 기대하지 않았던 히데요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1591년 아들(쓰루마쓰)을 잃은 히데요시는 조카인 히데쓰구를 정식 후계자로 삼아 도요토미 가문을 이미 물려준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을 계기로 히데요시와 히데쓰구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1595년 7월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모반죄로 몰아 자결시켰다. 후계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던 히데쓰구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로 하여금 새로 후계자 자리에 오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같은 해 8월 새로운 규정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 모리 데루모토 등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連署)하는 형식을 통해 발포되었다.

 

특히 이 규정에는 다이묘 상호간의 자주적인 맹약을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다이묘 상호간에 빈번히 동맹을 맺었던 센고쿠 시대와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유력 다이묘와 히데요시의 직계 가신인 봉행들로 권력기구가 구성되고, 1598년 7월에 5대로(大老) · 5봉행(奉行)의 형태로 직제가 정비되었다. 새로운 직제가 만들어진 직후인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히데요시 정책

일본 근세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석고제, 병농 분리, 쇄국은 모두 히데요시의 정책에서 연유했다. 즉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의 토지조사(다이코 검지=석고제), 무기몰수령인 도수령(=병농 분리), 크리스트교 금지(쇄국)의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근세 인물,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연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이와 맞지 않는 모습도 보이는데 사원과 천황 정책에서 보이는 복고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또 최근에는 히데요시의 정책을 근세 원형으로 보는 선행 연구를 비판하고 중세와의 연속성에서 파악하려는 시각도 커지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 위치

 

교토산맥 동쪽 아미토봉 정상에 있는 풍국사(鳳國寺)에 안장

풍국사와 도요도미 히데요시 무덤
풍국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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