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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와 에도 시대에 활동한 다이묘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년에 얻은 아들이다. 히데요시가 어린 히데요리를 염려하여 가신과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지만, 히데요시의 사망과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히데요리는 천하의 주인에서 오사카 지역의 다이묘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오사카로 물러난 이후에도 그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던 이에야스는 트집을 잡아 히데요리가 거주하던 오사카 성을 공격한다. 2년에 걸친 전투 끝에 히데요리는 생모와 함께 자결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리

출생 - 사망 1593년 ~ 1615년
시대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지위 다이묘
별칭 히로이마루(拾丸, 아명)
가문 도요토미(豊臣) 가문
부모 부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모 : 요도도노(淀殿)
배우자 정실 : 센히메(千姫)
측실 : 고이와노카타(小石の方)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1593년 8월 3일 히데요시의 2남으로 오사카 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이다. 히데요시에게는 정실인 기타노만도코로가 있었지만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측실인 요도도노 사이에는 쓰루마쓰(鶴松)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쓰루마쓰는 3세 때에 사망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히데요리의 탄생은 히데요시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경사였다. 1593년은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위해 나고야에 있던 시기이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있던 기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 아이의 이름을 ‘히로이’로 이름을 짓게 하고 또 마쓰우라 시게마사를 일종의 후견인인 히로이오야로 정하였다.

 

 

 

 

후계자가 없어 자신의 조카 히데쓰구를 후계자로 정해 두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친아들이 태어나자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넘기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595년 히데요시는 후계자로 정했던 히데쓰구를 모반의 죄로 몰아 그의 가족까지 모두 몰살시켰다.

 

이어 마에다 도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우리 데루모토 이하 모든 다이묘 및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등의 부교(奉行)들에게 히데요리에게 봉공(奉公)과 충성의 서약을 하도록 하였다.

 

 

 

 

1597년 9월에는 천황의 거처에서 5살인 히데요리에게 성인식에 해당하는 원복(元服) 의식을 행하였는데, 본래 원복 의식은 15세 전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히데요리는 종4위하의 관직인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에 서임되었으며 이듬해엔 종2위하 중납언(中納言)에 서임되었다.

 

1598년 7월 히데요시의 병이 악화되자 고다이로(五大老), 고부교(五奉行) 등의 직제를 만들어 재차 히데요리에와 공의(公儀)에 봉공을 맹세토록 하는 등 어린 히데요리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반 마련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리를 지지하던 서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휘하던 동군에게 패하자 히데요리는 셋츠 국, 가와치 국, 이즈미 국에 65만 7석의 영지를 보유한 다이묘로 전락하고 만다. 대신 명목상의 관위는 그 후에도 계속 올라 1605년 4월에 우대신(右大臣)이 되었다.

 

 

 

히데요리를 다이묘로 쫓아낸 후에도 그의 존재가 항상 마음에 걸렸던 이에야스는 ‘종명사건(鐘銘事件)’을 계기로 히데요리를 없앨 기회를 잡는다. 종명사건이란 호코지(方廣寺) 재건 당시 있었던 사건을 말한다.

 

당시 히데요리는 호코지(方廣寺) 재건 공사를 하면서 그 절의 범종에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 측은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을 安자로 잘라버린 것이고, ‘군신풍락’은 臣과 豊을 이어 도요토미(豊臣)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으로 이는 도쿠가와 가문을 저주하기 위해 새긴 글귀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내세워 히데요리가 있던 오사카 성을 공격한다.

 

 

 

오사카 전투는 1615년 겨울과 1616년 여름,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 도요토미 가문의 운명이 걸린 이 전투에서 히데요리는 총대장이었으나, 안전을 먼저 생각한 어머니 요도도노의 지시에 따라 성을 지키는 병사 앞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정실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를 중개자로 하여 구명을 청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하였다. 측실과의 사이에 1남 1녀가 있었고 센히메와의 사이도 좋았다고 전해진다. 히데요리가 살아서 규슈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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